역사는 때때로, 너무 일찍 태어난 이들을 잊지 않는다. 체사레 보르자, 그는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교황의 아들로 태어나, 추기경이 되었고, 곧 장군과 군주가 되었으며,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중부 이탈리아를 재편한 남자. 그의 생애는 찬란했고, 잔혹했으며, 무엇보다 불가사의할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그가 남긴 궤적은, 마치 권력 그 자체의 본질을 압축해낸 것처럼 여전히 우리를 매혹시킨다.
보르자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음모와 독, 근친상간, 폭정의 상징처럼 소비되었다. 그러나 그 어두운 이미지 뒤에는 철저히 계산된 전략가,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서 평가받는 체사레의 실상이 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그를 “운명만이 실패케 한 가장 유능한 군주”로 묘사했으며, 이 분석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체사레는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체로서 권력이었고, 그 권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다만, 세상이 아직 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는 냉혹한 현실주의자였으며, 동시에 화려한 르네상스 궁정의 산물이기도 했다. 추기경의 붉은 옷을 입고 로마 교황청의 권력 중심에 섰고, 군복을 입은 뒤에는 로마냐의 도시들을 하나씩 무릎 꿇렸다. 전장에서 그는 과감했고, 협상 테이블에서는 침착했으며, 통치자가 되었을 때는 공포와 질서를 함께 다뤘다. 체사레 보르자는 단지 아버지의 권위에 기대어 권력을 누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 권위를 실질적인 통치로 전환할 줄 아는 드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동맹과 배신, 선전과 숙청, 점령과 개혁이 교차하는 그의 삶은 단지 비극적 서사가 아니라, 르네상스 권력 정치의 축소판이었다. 그의 칼은 한 손에 법령을, 다른 한 손에 복수를 쥐고 있었고, 점령한 도시들에서는 동시에 광장 처형과 세금 감면이 이루어졌다. 그는 잔혹했지만 예측 가능했고, 냉정했지만 무질서보다는 질서를 택했다. 체사레를 따르던 자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그가 사라지자 혼란이 더 큰 공포로 되돌아왔다.
그는 어떤 제도도 남기지 않았고, 어떤 후계자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마키아벨리의 문장과 함께 살아남았다. 체사레는 실패했지만, 그 실패는 단지 운명의 굴절이었을 뿐, 그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너무 명확했고, 너무 빠르게 움직였으며, 그가 원했던 권력은 시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다.
오늘날 체사레 보르자는 한 인간의 실존을 넘어, 정치의 얼굴, 권력의 본질, 그리고 리더십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그는 거대한 체제 안에서 태어나, 그 체제를 이용해 권력을 얻었으며, 그 체제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만든 것은 모두 무너졌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권력은 어떻게 얻고,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중세사 연구학회는 중세의 역사와 정치, 경제, 생활상을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중세의 역사적 사건을 연구하며 축적된 지식을 정리하여 쉬운 글로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