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고요히 기록된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늘 무언가를 담고 있다.”
『베네벤토 연대기』는 남이탈리아의 중심 도시였던 베네벤토 공국의 역사적 흐름을, 내부인의 시선으로 꾸준히 기록한 귀중한 사료다. 이 연대기는 화려한 문장이나 서사적 구성없이,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으로 사건을 나열한다. 그러나 바로 그 건조함 속에서, 우리는 정치적 권위의 작동, 교회와 세속의 긴장, 전쟁과 평화의 윤곽, 그리고 무명의 백성들이 겪은 고통과 침묵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은 『베네벤토 연대기』의 전체를 번역하거나 완전한 주석을 달기보다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의미 있는 지점들—즉 사건의 전환, 제도의 균열, 기억의 선택—을 중심으로 해설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이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단지 중세 베네벤토의 연표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녹아 있는 사유와 감정, 두려움과 욕망, 침묵과 해석의 구조를 함께 목격하게 될 것이다.
특히 이 책은 정치사나 교회사에 국한되지 않고, 중세 사회 내부의 구조와 감각을 해명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귀족과 성직자의 권력관계, 도시와 주변 지역의 경제 차이, 성유물과 건축에 담긴 상징정치, 흑사병과 지진 같은 재난에 대한 종교적 반응 등은 모두 베네벤토라는 도시국가가 어떻게 신앙과 권력, 기억과 삶의 질서를 구축하고 해석했는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사례들이다.
연대기의 기록은 늘 단순하고 조용하다. 그러나 그 침묵과 여백을 따라가는 일은, 과거를 다시 살펴봄으로써 현재의 사유를 깊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이 그러한 사유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중세사 연구학회는 중세의 역사와 정치, 경제, 생활상을 연구하는 모임입니다. 중세의 역사적 사건을 연구하며 축적된 지식을 정리하여 쉬운 글로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